연재 [빈들의 양식] #31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30과
제목: 십자가
(마26-27, 막15, 눅22-23, 요18-19)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감람산에서 기도하던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사병들에게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의회의 심야 법정과 헤롯 왕, 그리고 로마의 빌라도 총독 법정에서 재판과 고난을 받았다. 빌라도는 예수를 사형시켜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주었다. 결국, 골고다 언덕 위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고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곱 마디를 남긴 후 운명하였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308-318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예수가 각기 다른 재판정에서 세 번의 재판을 받을 때 법정 질문 요지는 무엇이었는가?
2. 빌라도 총독은 예수 심문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어떻게 내렸는가? (마18:38, 눅23:4)
3.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이유와 이방인 세상 나라 대표로서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이유로 무죄한 예수가 십자가에 죽게 되었던 사실이 보여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4.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일곱 마디 말은 무엇이며 그것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5. 십자가의 이중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6. 성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 본문 해석 노트
1. 예수에 대한 세 번의 재판은 오히려 그의 무죄를 증명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사병들을 시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예수를 붙잡았고 그의 관사에서 산헤드린 공의회 이름으로 비공식 심야 법정을 열었다. 심문 과정에서 “너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느냐?”라고 묻지 않고 “너는 누구냐? 네가 메시아냐?”라고 묻는 이상한 재판을 진행했다. 예수는 “내가 그니라! I am He”라고 대답했다. “예수, 그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사복음서의 화두가 예수 공생애 끝까지 이어졌다. 그 질문은 현재까지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생명과 멸망, 천국과 지옥의 운명을 결정한다.
메시아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한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죄가 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죄를 밝히려고 하기보다 ‘신성 모독죄’라는 죄명을 이미 결정해놓고 자백을 강요했다. 헤롯 법정은 예수가 종교적 희생양임을 알았고, 빌라도 법정에서도 법적 무죄를 재확인했다. 그런데도 집단 이기주의와 정치적 상황 논리에 밀려 예수는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유대인 대표회의 산헤드린과 이방인을 대표하는 빌라도 총독의 로마제국은 온 인류였다. 곧 인류가 합작하여 예수를 죽였다.
세 번의 인간 법정을 통해 예수가 죽게 된 듯 보여도 실제는 하나님이 예수를 버렸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던 말이 이 사실을 확인한다. 예수는 우리 대신 죄인으로서 버림받았다. 그가 버림받았기에 우리가 용서받고 영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예수를 십자가 극형에 처하여 죽게 한 근원적인 원인 제공자는 그 누구도 아닌 죄인인 우리 자신이었다. 오, 주여!
2. 기독교는 저주와 축복의 이중성을 가진 십자가의 종교이다.
십자가 처형은 극형이었고 저주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로마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인간이 자기의 죄를 짊어진다면 영원한 종신형벌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받을 심판의 형벌과 저주가 면죄되었다. 예수가 짊어진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들의 축복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율법의 선포와 어린양 예수의 희생으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선포였다. 예수 십자가는 저주와 축복의 이중적 상징이 되었다.
인생의 고통은 육신적이든 정신적이든 근원적으로 죄의 대가와 관련이 있다. 죄는 인생의 고통, 절망, 슬픔, 허무의 집합체인 사망에 이르게 한다. 삶의 부정적인 모든 현상은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의 영적 갈증의 표출이다. 십자가상의 예수는 “내가 목마르다”라고 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그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예수는 심한 갈증을 호소했다. 육체적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영적 갈증이다. 그것은 지옥의 목마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나아오라”라고 초청했다(사55:1).
인생의 고통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고통을 느끼면 해소를 위한 치료 노력을 하게 된다. 나병 환자들은 손발이 떨어져 나가고 몸이 문드러져도 고통을 못 느껴서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죄로 인한 고통은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켜 구원의 동기를 갖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고통을 허락하신다. 고통의 긍정적인 면 때문이다.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을 하나님의 초청으로 듣는 자가 지혜롭고 복 있는 사람이다.
3. 예수의 십자가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기독교 복음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믿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했다. 구원 사업을 완성하고 그 길을 마련했다는 말이다. 신자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주님이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미 베풀어 놓은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미 완성되고 마련된 구원이 복음이다. 완성된 복음으로 구원을 얻었기에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사라지거나 취소될 수 없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천국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남용하여 하나님과 그의 법을 경시하면 아무리 깊은 은밀함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아프게 뒤따를 것이다.
4. 예수 십자가 의미를 알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신앙을 가진다.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잘못된 접근 중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 신앙생활의 본질로 오해하는 것이다. 주일날 예배 중에 들었던 말씀을 한 주간 동안 실천하려고 애쓰는 삶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도로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책감으로 자괴감에 빠진다. 이것은 자의적 신앙이요 율법적 신앙이다. 내 힘과 의지로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신앙생활 접근이다. 주님은 나의 의지적 결심으로 율법 말씀을 준수하며 신앙생활 하라고 강요하기보다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으라고 했다.
십자가를 지는 신앙생활의 첫 번째는 자기 부인이다. 내 연약함을 인식하고 내 잘못을 시인해야 주님의 강함과 용서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다.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전적 위탁의 신앙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다 짊어진 것처럼 자기희생으로 화목을 만들고, 세상에 함몰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의 수고를 기꺼워하게 된다. 역경과 고난이 와도 불평이나 책임 전가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인내하고 순응하는 삶, 곧 십자가를 지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십자가 복음의 비밀로 구원 얻음에 그치지 않고, 복음으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자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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