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7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7과
제목: 첫 유대 지역 사역 (요2:23-3:30)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공식적인 등장 이후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 머물면서 표적을 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중 율법 학자요 종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질문했고 대담과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68-73 참조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공식 등장 이후 유대 지역에 머물며 얼마 동안 사역했는가? (요2:23; 3:22; 4:35)
2.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요3:22-30)
3.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며 왜 예수를 찾았을까?
4. 예수가 니고데모 심중의 질문을 헤아리고 꺼낸 주제는 무엇인가?
5.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또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요3:3,5)
6. 예수가 성령의 역사를 바람으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인가?
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에 대한 니고데모와 예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8. 인자人子는 어떤 존재이며, 광야의 놋뱀 사건과는 어떤 상관성을 가지는가?
☞ 본문 해석 노트
1. 예수의 유대 지역 초기 사역은 세례요한 사역의 연장 선상에서 시작했다.
예수는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 표적을 행하며 8개월 동안 사역했다. 추수할 때(다음 유월절)가 4개월쯤 남은 때에 갈릴리로 이동했다(요4:35). 예수는 초기 사역에 세례를 베풀며 세례요한 사역의 연장 선상에 있음을 나타냈고 많은 세례요한 추종자들을 흡수했다. 세례요한은 이를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라고 하며 크게 기뻐했다. 예수의 첫 메시지 또한 세례요한 메시지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의 초기 유대 사역 중에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깊이 고뇌하며 갈등하는 니고데모를 소개한다. 그는 예수의 메시지와 사역에 관심을 두고 그를 추종했던 많은 사람 중에 대표적인 한 사람이었다.
2.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인간의 노력, 선행으로 그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없다며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거듭남은 관점의 전환을 가져온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예비하고 계시한 ‘인자’人子를 보고 아는 것이 열쇠다. 인자는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 메시아를 의미했다. ‘사람의 아들’이란 뜻의 인자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사람인 그런 존재였다. 그는 사람으로 온 하나님이었다. 굳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나님이 왜 사람으로 왔으며 그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였고 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는 모세의 광야 놋뱀 사건(민21:4-9)의 유비를 들어 십자가 구원의 길을 쉽게 설명해 주었다.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아주 쉽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된 때에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았던 것과 같다. 심판과 사망에 처한 죄인이 구원을 갈망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십자가 예수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3. 올바른 방법을 모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길은 아주 쉽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 하나님은 대단히 어렵고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독생자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에게 쉬운 길이 열린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 하늘 소식에 무지하다. 자기 생각과 눈에 보이는 일에만 마음이 팔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무관심하고 갈망도 없다. 그래서 영생의 길을 가는 사람은 소수이다. 멸망으로 가는 길은 크고 넓어도 영생으로 가는 길은 좁은 문이다(마7:13-14).
4. 하늘 일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영적인 거듭남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바람을 예로 들었다. 바람 자체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선악이나 하는 일 자체만으로 구별되지 않는다(요3:6). 공부, 사회생활, 경제생활에서 거듭난 영의 사람이 하는 일은 영적인 하늘 일이고 육의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육의 일이며 땅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추상적이지 않다. 개념적이면서도 실제적이다. 바람에 쏠리는 나뭇가지처럼 실제적이며 거듭난 눈에는 성령이 역사하는 방향이 보인다. 영의 눈이 열린 자는 하늘 일이 보이고 하늘 일을 보는 만큼 저절로 행하며 살게 되는 것이 영적인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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