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21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21과
제목: 예수 제자 공동체의 내부 갈등
(마18:1-35, 막9:33-50, 눅17:1-10)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예수와 제자들은 은둔 여행을 마치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버나움 사역본부로 돌아왔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기 위한 예루살렘행을 생각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예루살렘행에서 예수의 혁명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 기대하며 흥분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누가 요직을 맡을 ‘큰 자’인가의 문제로 암투와 쟁론이 심각해졌다. 그 갈등 과정에서 제자들은 미움, 용서, 사랑, 신앙의 화두를 붙들고 씨름했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241-243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제자들이 예수에게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질문한 배경과 상황은 무엇인가?
2.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라고 했는가? 또 예수의 답변 과정에서 잃은 양의 비유를 든 것은 이 주제와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
3.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는 어떤 대답을 하였는가? 또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비유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4. 용서에 관한 예수의 대답에 관하여 누가복음 저자가 표현한 핵심 단어는 무엇인가? 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비유와 무익한 종 비유는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
5.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주된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에 관하여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 본문 해석 노트
1.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낮아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어떤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인지 물었다. 누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께 성숙한 자로 인정받고 요직을 맡을 수 있는 일꾼이냐는 질문이었다. 예수는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어린아이는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이나 자신의 어떤 조건적 판단으로 우열을 전제하고 접근하지 않는다. 자기 앞에 있는 아이가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무런 전제 없이 마음을 연다. 어른들은 소유, 지위, 능력을 비교하여 판단하고 사람을 대한다. 우월감과 열등감을 만드는 비교 판단이 모든 죄의 뿌리다. 바울은 인간의 죄를 나열하고 설명할 때 판단하는 죄를 가장 먼저 들면서 그 죄는 역으로 하나님의 판단(심판)을 받는다고 했다(롬2장).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육신을 따라, 곧 인간적 판단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고후5:16-17). 어린아이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본다. 한 마리 잃은 양의 귀함을 보는 주님, 그의 마음으로 지체를 보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큰 자는 목사, 장로 등의 직분, 또는 가진 바 능력이나 소유가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귀하게 보는 사람이다.
2.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정죄가 없는 자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롬4:6-7). 용서는 기독교의 핵심 주제이며 하나님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받는 하나님의 용서는 영원한 용서이다(롬8:1).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은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 최우선적인 일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주님의 용서를 피상적으로만 아는 사람이다. 베드로는 예수에게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세상은 일반적으로 세 번까지가 용서의 최대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표현으로 용서의 한계를 허물어 버렸다. 예수는 달란트와 데나리온을 비교하며 엄청난 하나님의 용서를 일만 달란트로 비유했다.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다. 일 달란트는 일만 데나리온에 해당함으로 일만 달란트는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액수였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바 죄의 무게를 알고 한계 없는 하나님 용서의 크기를 알 때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상처 준 형제의 죄는 하나님 용서에 비교하면 일 데나리온 가치밖에 안 된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보다 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을 때 내 마음에 용서의 샘물이 차오른다. 주님께 빚을 갚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할 때 조건 없는 용서가 가능하다. 거지에게 적선하듯 하는 용서가 아닌 순전한 용서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3.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아셨다. 그러나 지체를 실족케 하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라며 목숨을 걸 만큼 무거우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이 나를 실족케 하면 끝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 자신도 부지불식간에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산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그러나 용서는 이성적으로 알고 결심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다. 용서는 십자가에 죽어야 할 만큼 어렵다. 누가복음 저자는 ‘용서는 믿음의 문제’라고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용서에 대한 믿음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주 미미한 겨자씨로 비유했다. 그 믿음의 씨는 작아 보이지만 썩지 않는 하나님 생명이 깃들어 있어 뽕나무를 던져 바다에 심는 불가능도 가능케 한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용서를 가능케 한다.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있을 때 자랑이나 교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순전하게 용서할 수 있다. 마치 종은 주인에게 받은 명령을 모두 수행했다고 주인의 특별한 감사를 기대하지 않으며 무익한 종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과 같다.
4. 그리스도인은 화목케 하는 직분을 받았다.
죄는 불화를 가져온다.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 부부간에 불화가 생겼고 가인과 아벨처럼 형제간에, 그리고 자연과도 불화가 생겼다. 물 좀 달라는 사람과 물 한 컵 주지 않는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고 실족케 하는 자와 실족을 당하는 자 사이에 불화가 있다. 불화는 공동체를 깨뜨린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용서를 통한 화합이 중요하다. 예수는 “너희 공동체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9:50)라고 했다. 예수는 소금처럼 녹아 화목 제물이 되었다. 공동체 구성원의 이기적 자아가 살아있으면 반목과 불화가 있고 서로 용서하면 소금을 쳐서 숨이 죽은 절인 배추처럼 화목이 있다. 화목은 빛 가운데 영적 교제가 열리게 하고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한다.
교회는 선포를 통해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위임받았다(요20:22-23). 그리스도인은 불화와 어둠이 있는 곳에 회개와 죄 용서를 선포하고 소금으로 화목케 하는 직분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소금이다. 주님은 작은 자들에게 행한 일을 반드시 기억하고 상을 베푼다고 했다. 작은 자는 세상에서 멸시받고 소외된 사람들이며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예수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화목의 직분을 감당할 때 주님이 상을 베푸신다. 세상적 소유에서 오는 육신적인 기쁨은 잠깐이고 주님이 상으로 베푸시는 신령한 기쁨은 영원하다.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 같이 신령한 기쁨을 사모하자.
☞ 나의 노트
'박영주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재 [빈들의 양식] #23 (0) | 2021.11.25 |
---|---|
연재 [빈들의 양식] #22 (0) | 2021.11.11 |
연재 [빈들의 양식] #20 (0) | 2021.11.04 |
연재 [빈들의 양식] #19 (0) | 2021.11.04 |
연재 [빈들의 양식] #18 (0) | 2021.10.28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연재 [빈들의 양식] #23
연재 [빈들의 양식] #23
2021.11.25 -
연재 [빈들의 양식] #22
연재 [빈들의 양식] #22
2021.11.11 -
연재 [빈들의 양식] #20
연재 [빈들의 양식] #20
2021.11.04 -
연재 [빈들의 양식] #19
연재 [빈들의 양식] #19
2021.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