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주의 단편소설 연재 [아그니의 불] #1

수확 철이 가까워진 사탕수수밭, 사람 키를 훌쩍 넘긴 수숫대와 잎들은 햇빛을 머금은 채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그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아그니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칼끝 같은 수숫잎들이 흔들리며 더운 열기가 그의 마음속에 쌓인 분노처럼 얼굴로 밀려들었다.
그의 이름 아그니는 힌두교 불의 신에서 따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종종 불같은 그의 성격이 이름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아그니 신은 하늘과 땅, 공중에 동시에 존재하는 신이야. 태양이고 천둥번개이며, 모든 생명 안에 깃든 불꽃이지. 우리 아들 안에 아그니 불이 있으니 장차 큰일을 할 놈이야.”
아그니는 기울어진 양철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의 한쪽, ‘탄’이라 불리는 작은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로 만든 낮은 단 위에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샤 신상이 놓여 있었다. 가슴까지 길게 늘어진 코끝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탄 앞에서 푸자를 드리며 고개 숙인 어머니의 옆모습에 시선이 갔다. 유난히 흰 그녀의 피부가 창백하게 느껴졌다. 흰 피부는 브라만 계급의 혈통이 섞인 흔적이었다. 키가 크고 얼굴선이 반듯한 어머니가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나설 때면 매우 품격 있어 보였다.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때만 해도 아그니는 아버지 말씀대로 신들이 그의 꿈을 이루어 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전지훈련을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먹구름이 온 집안을 짓눌렀다.
아그니는 잠결에 비명을 들었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불이 켜진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방, 조금 열린 문을 통해 침대 머리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불쌍한 것…
그는 다시 방문을 닫고 누웠다. 여동생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깨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딸을 다독이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증상이 악화하여 여동생은 결국 휴학을 했다. 꽃 같은 나이에 누런 얼굴은 병색이 역력했고, 동네 어귀에 거꾸로 깎아 세운 검은 고사리 나무처럼 앙상하게 마르며 생기를 잃어갔다.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하나뿐인 예쁜 여동생은 2년 전만 해도 밝고 건강한 소녀였다.
그의 가정에 몰아친 어둠은 이모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닮은 이모는 빼어난 미인이었다. 오뚝한 코에 작은 입술, 인형같이 동그란 눈동자와 짙은 눈썹, 날씬한 몸매의 예쁜 이모를 그는 늘 자랑스러워했다. 늘 환하게 웃고 귀여워해 주는 이모를 몹시 따랐던 그는 미래 그의 배우자도 이모만큼 예쁘고 상냥한 여인이기를 바랐다.
이모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위었고 아그니의 아버지는 처제의 보호자가 되었다. 집에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시집까지 보냈다.
그녀는 같은 동네 일곱 살 연상인 쿠말과 결혼했다. 건장하고 근육질의 그녀 남편은 사탕수수 노동자였고 그들은 한동안 행복하게 잘 사는 듯했다.
언제부터인가 쿠말은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양길로 접어든 피지의 사탕수수 농업으로 벌이가 시원찮아 지면서부터였다. 술주정뱅이가 된 그는 만취 상태에서 자주 아내를 구타했고 술이 깨면 잘못을 빌었다.
이모 얼굴에서 웃음이 점점 사라졌다. 살림이 점점 궁색해지자 그녀는 어렵게 재봉틀 한 대를 할부로 마련했고, 읍내에서 일감을 받아다가 집에서 옷 수선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녀는 일감을 가져오고 갖다 주기 위해 읍내를 왕래할 때마다 버스보다는 밴을 이용했다. 피지의 12인승 영업용 밴은 손만 들면 언제나 탈 수 있었고, 손님이 원하면 어디서나 정차하였다.
그녀가 큰길가에서 손을 들자 밴이 바로 멈췄다. 그녀가 자주 타는 밴의 운전기사는 근처 마을에 사는 샴이었다.
"오늘도 반만 내."
"안 돼요."
"됐어. 다음에 많이 벌면 그때 내.“
이모는 손재주가 좋아 옷가게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고 정식 직원으로 취직하여 라우토카 시내로 출퇴근하였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샴은 차비를 반값만 받았다. 그녀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매번 운행 시간을 어림잡아 큰길에서 그의 밴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와 샴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이모부 쿠말은 도망간 아내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샴의 아내 또한, 도망간 남편을 찾으려고 울며불며 애를 썼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to be continue
'박영주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재 [빈들의 양식] #31 (0) | 2021.12.03 |
|---|---|
| 연재 [빈들의 양식] #30 (0) | 2021.12.03 |
| 연재 [빈들의 양식] #29 (0) | 2021.12.03 |
| 연재 [빈들의 양식] #28 (0) | 2021.12.03 |
| 연재 [빈들의 양식] #27 (0) | 2021.12.01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연재 [빈들의 양식] #31
연재 [빈들의 양식] #31
2021.12.03 -
연재 [빈들의 양식] #30
연재 [빈들의 양식] #30
2021.12.03 -
연재 [빈들의 양식] #29
연재 [빈들의 양식] #29
2021.12.03 -
연재 [빈들의 양식] #28
연재 [빈들의 양식] #28
2021.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