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15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15과
제목: 대중 사역의 절정
(눅8:40-9:6, 마13:53-14:12, 요6:1-15)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갈릴리 2차 사역 후반에 예수는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고, 혈루증 여인을 고쳤다. 그리고 고향 나사렛 전도를 시도했으나 또다시 배척을 받는다. 그는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며 순회 전도를 했고 그 무렵 세례요한이 참수된다. 세 번째 유월절 즈음 벳새다 근교 빈 들에서 있었던 오병이어 사건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예수 사역의 절정이었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198-214 참조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예수와 제자들이 나사렛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때는 언제쯤이며 반응은 어떠했는가?
2. 세례요한이 참수당한 때는 언제쯤이며 그 계기는 무엇 때문이었는가?
3. 영적인 추수 때라며 제자들을 둘씩 파송한 순회전도 사역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4. 예수와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벳새다 빈들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
5.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당시 예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 본문 해석 노트
1.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병은 접촉으로 완치된다.
누가는 야이로 회당장의 죽은 딸과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의 이야기를 한 묶음으로 소개한다.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의 그림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아담은 930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담 안에 죽음은 시작되었고 창조주와 영적 생명이 단절되었다. 혈루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여인처럼 죽음의 병이 든 인류는 완전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죽음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실존이다. 영적인 죽음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영원한 지옥의 죽음으로 몰아간다. 여인은 예수의 겉옷을 만져 혈루병이 완치되었다. 예수의 겉옷과 같은 성경 말씀과 접촉하게 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 치유된다. 영적 접촉은 혈루병 같은 죄로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호흡이 끊긴 야이로의 딸 같이 영적으로 죽은 인간도 부활시킨다. 이 신비는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실재이다.
2.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파송했다.
세례요한이 처형되고 예수는 자기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갈릴리 여러 지역에서 사역하던 예수는 다시 한번 회개할 기회를 주려고 고향 나사렛을 찾아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조바심을 냈다. 추수할 곳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다며 제자들을 재촉하여 둘씩 짝을 지워 파송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권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했다. 모든 이적과 기사는 복음 전파를 위한 방편이었다.
이 땅에서 예수의 존재 목적과 사역은 하나님 나라였다. 누구든지 그 나라 안에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고 당부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은 현세적인 축복뿐이다. 천국 복음이 그들에게는 돼지에게 주는 진주와 같다. 갈급한 영혼의 잃은 양들에게만 복음은 능력이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나 잃은 양이며 영적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직업적 일꾼들은 넘쳐나는데 주님은 아직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꾼이 부족하다며 추수할 하나님 나라 일꾼을 찾으신다.
3. 예수는 빈들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떡(양식)이었다.
예수는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휴식을 취하게 하려고 한적한 장소를 물색했다. 배를 타고 벳새다 근교 빈들로 향했다. 제자들에게는 휴식이었지만 예수는 세례요한의 죽음에 이어 자기의 때도 급함을 인식했다. 그는 사역의 다음 단계를 구상하기 위해서 빈들을 찾은 것 같다. 그곳에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가 소문을 듣고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월절 명절인데도 그들은 예년과 달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예수를 만나려고 몰려들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긴 예수는 병자를 치료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다. 날이 저문 빈들에 허기진 무리, 그것은 인생의 본질을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인류는 저녁이 가까워 어둠이 내리는 빈들에 허기진 영혼으로 방황하고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역사를 베풀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운집한 군중을 배불리 먹게 했다. 장정만 오천 명쯤 되었으니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만 명도 넘었을 것이다. 이튿날 가버나움에서 예수는 오병이어가 자신이라고 은유적 해석을 했다. 그는 보리 떡처럼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지만, 생명의 양식이었다. 그는 자기의 살과 피를 먹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빈 들에서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였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풍성함’이다. 목자로서 예수는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왔다고 했다(요10:10). 열두 광주리 부스러기 음식처럼 십자가에서 자아가 깨어진 성도들, 예수 생명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복이 있다(계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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