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12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12과
제목: 예수 공동체의 조직 정비
(눅6:12-49, 마5-7장)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예수는 공생애 두 번째 유월절 즈음에 유대 지역에서 한동안 사역한 후 다시 갈릴리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많은 무리가 그를 좇았다. 게네사렛 평원 근처로 추정되는 곳에서 홀로 밤새 기도한 후 산에서 내려와 열두제자를 확정하며 조직을 정비했고 비전 선언문 성격의 산상수훈을 선포했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176-181 참조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예수가 유대 지역을 떠나 갈릴리로 가는 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2. 예수가 그를 좇는 무리를 두고 홀로 산에 올라 밤새 기도한 특별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3. 열두제자를 확정한 때는 그의 공식 사역 후 얼마 만이었을 것으로 보는가?
4. 예수가 산상수훈을 베풀 때 함께 있었던 청중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5. 산상수훈은 구약의 십계명 및 율법 내용과 어떻게 대조가 되는가?
6. 산상수훈 내용 중에 오늘 나에게 특별히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인가?
☞ 본문 해석 노트
1. 예수의 산상수훈을 듣는 청중은 대부분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질병과 가난, 삶의 고통과 절망 등 영혼의 갈증으로 몸부림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등장으로 희망을 엿보았고 예수의 행보를 지켜보며 확신했을 것이다. 세례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았던 그들은 예수의 메시지가 도덕과 윤리 강의만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가 전하는 희망과 생명의 메시지를 눈물을 흘리며 가슴으로 들었을 것이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처럼 그들은 말씀을 체험했을 것이다. 예수는 심령이 가난해진 그들을 보며 그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난한 심령을 가진 청중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섰음이 분명했다. 그 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 땅에 임하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심령 안에 자리 잡은 하나님 나라는 그의 백성들에게 세상에 대하여 가벼운 영혼으로 살게 한다. 가벼운 영혼은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누리는 자유함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증거이다.
골고다 언덕에서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한 죄인에게는 예수가 “이제 곧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회개하며 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 자는 분명히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2. 산상수훈 내용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행복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그것을 알기에 예수는 그들에게 행복을 약속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된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 자체로 이미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행복은 이 세상 문제들이 발목을 잡을 수 없는 궁극적인 행복이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의 누림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했다. 산상수훈의 팔 복은 세상에서 뭔가를 소유하고 쾌락을 누리는 것과는 관계가 먼 가난, 애통, 목마름, 박해 등과 관계있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예수가 말한 그 행복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소유한 샬롬의 행복이 보이지 않는다. 산상수훈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내 인생의 가치관 속에 진리의 복음으로 행복의 정의가 새로워졌는가?
3. 산상수훈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최고 가치인 사랑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으므로 예수는 열두제자를 확정하고 조직을 정비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 산상수훈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그곳의 일차 청중은 선발된 제자들이었다. 산상수훈은 그들에게 예수 공동체의 비전 선언문이었다. 이차 청중은 예수의 메시지가 가슴으로 들렸던 군중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를 가르쳤다. 그것은 나 한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지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성숙한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삶으로 이웃과 사회에 하나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산상수훈은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었다. 모세를 통해 받은 십계명과 율법은 유한한 인간의 자력으로 실천하기 어려웠음을 구약성경이 보여 주었다. 율법은 선하지만 준수할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율법은 오히려 족쇄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과 사랑이 닿는 순간 그 율법은 하나님 나라의 계명이 된다. 예수의 생명은 계명을 준수할 능력으로 역사하여 하나님 백성들의 삶을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듯(겔37) 생명력을 활성화한다. 이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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