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24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24과
제목: 예수의 초막절 설교Ⅱ (요8:12-10:21)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초막절 기간 중 예수는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것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고쳐주었다. 당국자들과 갈등이 더 고조되었지만, 예수는 성전 안에서 담대하게 “세상의 빛” 설교를 했다. 그리고 모세오경의 히브리적 화법을 사용하여 빛과 진리와 자유를 주제로 설교를 이어갔다. 또 자신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참 목자라며 그의 메시지는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갔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258-267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예수는 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었는가? 그 사건을 알게 된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으며 그들에게 예수는 무슨 말을 하였는가?
2.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다. 그 빛의 의미는 무엇인가?
3. 사람들이 예수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예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4. 예수의 설교에서 빛, 진리, 아들, 자유는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
5. 선한 목자의 독특한 특성은 무엇이며 예수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했는가?
☞ 본문 해석 노트
1. 세상의 빛으로 온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유대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그 입구에는 출애굽 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불기둥을 기념하는 큰 등불이 세워져 있다. 초막절에 그곳을 드나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드나들면 꼴을 얻을 것이다.”(요10: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 예수는 스스로 문이요 길이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비유다. 또 자신이 진리요 빛이요 생명이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이다. 진리와 ‘아들(예수)’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자유를 준다(요8:32, 36). 메시아 예수와 함께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가 영적인 시각장애인이다. 예수는 안식일에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떤 사람을 길에서 만나 치료해 주었다. 그 일로 눈을 뜬 자는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자로 고백했고 예수는 그가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도 떴음을 바리새인들과 비교하며 언급했다. 육신의 눈을 뜨고있어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예수의 말에 바리새인들이 분개했다. 예수는 그들에게 눈먼 사실을 안다면 죄 문제를 해결 받겠지만 시각장애인이 아니라고 하니 죄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했다(요9:41). 영적인 시각장애인은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이다. 예수는 신체적인 눈먼 자와 영적인 눈먼 자를 대조하며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내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눈이 열리고 예수의 빛과 진리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2. 예수는 그가 메시아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평범하지 않은 예수의 메시지를 들으며 사람들이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요8:25). 이 질문은 복음서가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화두였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는데 너희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너희가 나를 보내신 분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이다.”(요8:25-26, 메시지 성경). 십자가의 때가 가까워졌기에 예수는 자기가 메시아임을 직설적으로 말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그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니 그 증언은 참되지 못하며 효력이 없다고 말했을 때 예수는 자기가 스스로 증언해도 충분히 자격이 있는 존재이지만 굳이 증인을 요구한다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증인이라고 했다(요8:13-18).
갈릴리에서 예수는 시각장애인을 치료할 때 안수하여 치료했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진흙과 침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했다. 예수는 왜 그를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 씻게 하였을까?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었다. 단순한 치유 사역을 넘어 그 일을 행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 보냄받은 메시아로서 자신을 암시하였다. 누구든지 보냄받은 자의 말을 듣고 따르면 영적인 눈을 뜨게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사건이었다.
아버지께 ‘보냄을 받은 아들’로서 예수의 자기 계시는 혈통과 출생 개념이 아니라 소속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신학적 개념의 “유출(come from)”을 의미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별개이면서 같은 본질을 가진 존재다. 이에 관하여 예수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8:23)라고 설명했다. 또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리라”(요8:28)라고 했다. 곧 “내가 그다.”(I am He.)라는 말이었다. 모세 때부터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야훼요(I am who I am.), 오리라 예언된 메시아가 자기라는 의미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존재로서 예수의 자기 계시가 분명함에도 예수를 다만 위대한 성인 중 한 사람으로만 안다는 것은 인간의 무지요 인간의 유한함을 드러내는 소치일 뿐이다.
3. 진리를 알고 확신하는 신앙이 자유를 누린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했고(요10:10), 우리의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누리는 풍성한 생명 중 가장 귀한 것은 자유함이다. 예수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다(요8:32).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현재 종살이하고 있지 않거늘 어찌 자유자가 된다고 하느냐 반문했다(요8:33). 세상이 추구하는 정치 경제적 자유, 인권적 자유, 언론과 양심의 자유는 참 자유의 작은 형식에 불과하다. 예수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다. 참 자유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단절됨으로써 오는 근원적인 상실로부터 회복된 자유이다. ‘아들’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8:36). 중보자로서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하며 자유케 한다. 아들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17). 기독교 진리는 이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이다.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과 아들이 자유케 한다는 말이 같은 이유다.
예수는 “너희가 내 말을 붙들고 내 말대로 살아가면 진정한 내 제자가 되고 자유케 되리라.”라고 했다(요8:31-32). 예수 믿고 구원받아 기쁨을 맛본 후 여러 가지 시험으로 실패하여 구원의 확신마저 흔들리는 것은 구원의 기반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은 사실에 근거한다.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다는 진리의 말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모든 의심에서 자유하게 된다.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에서도 내가 주체가 되면 실패하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주체가 되는 진리를 인식하고 믿을 때 자유케 된다.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사탄의 종이 되지만 내 안에 있는 진리의 영이 조명해주는 앎, 진리를 알고 확신하는 바로 거기에 자유가 있다. 자유함이 없는 신앙생활은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속임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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